(2014년 11월 21일)
◆신이 인간을 빚었나
- 성경은 창세기 1장 27절에서 ‘하느님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God created man in his image)’고 했다. 반면 진화론자들은 빅뱅 이후 지구 생물의 진화 과정에서 인간이 나왔다고 본다. 창조론과 진화론은 출발역부터 갈린다. 과연 성경 속 창세기 편을 양쪽은 어떻게 볼까.
▶장 교수=우주 안에서 인간이 존재하게 된 것은 놀라운 신비다. 그런데 우리는 과학을 통해서 이 ‘신비’를 파악하기 시작하고 있다. 그 중요한 단서가 진화론에서 나온다. 그럼 성경을 기술할 당시는 어땠을까.
▶차 신부=그들은 어떻게 봤나.
▶장 교수=피카소의 그림을 보라. 사람 얼굴을 실제와 달리 찌그러뜨렸다. 왜 그런가. 피카소는 사실을 그린 게 아니기 때문이다. 예술적 직관을 그린 거다. 성경도 마찬가지다. ‘나는 누구인가’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에 대한 종교적 직관을 기록한 거다. 그게 창세기의 내용이다. 그런데 피카소의 그림을 실제 얼굴의 사진이라 해석하고, 거기서 얼굴 모습만 찾으려 한다면 어떻게 되겠나. 작품성을 놓치게 된다. 성경도 마찬가지다. 성경의 표면적인 문자만 붙들면 성경에 담긴 진수를 놓치게 된다. 결국 본질은 놓치고 껍질만 붙드는 셈이다.
▶차 신부=그건 정확한 이해다. 성경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기록됐는지를 알면 쉬워진다. 성경은 창세기가 아니라 출애굽기(모세가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이집트를 탈출하는 편)부터 씌어졌다. 해방 사건이 먼저 있었고, 이 엄청난 기적을 통해서 하느님을 깨닫게 된 거다. ‘그 누군가가 누구냐?’ ‘그가 하늘과 땅을 지어낸 분이다’란 인식과 함께 성경을 기술한 것이다.
◆신의 창조-어떤 방식인가
- 차동엽 신부는 오스트리아 빈 대학에서 성서신학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장 교수의 ‘피카소 이야기’에 공감하는가를 물었다.
▶차 신부=공감한다. 우리는 시•공간의 제약을 받는 3차원에 살고 있다. 그런데 하느님은 3차원 너머에 계신 초월적인 존재다. 그러니 하느님의 창조는 3차원에서 이뤄진 게 아니다. 4차원이나 5차원, 아니면 6차원 너머에서 이뤄졌을지도 모른다. ‘하느님이 실제 진흙으로 인간을 빚었다’는 이해 방식은 3차원적 사고에 갇힌 거다. 그런 생각은 신앙적으로 더 큰 잘못이다. 초월적 존재의 하느님을 인간의 3차원적 사고 안에 가두고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그걸 떠나 계신 분이다.
▶장 교수=차 신부의 얘기를 들으니 가톨릭을 다시 보게 된다.
◆과학과 종교-친구인가, 적인가
▶차 신부=가톨릭은 중세 때 과학을 박해했다. 과학자들은 당시의 절대믿음이었던 천동설(天動說)에 반하는 지동설(地動說)을 들고 나왔다. 가톨릭은 이들을 이단으로 몰았다. 나중에 지동설이 맞다고 밝혀지자 가톨릭은 엄청난 쇼크를 먹었다. 과학의 결론을 섣불리 예단하면 큰 망신을 당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게 2000년 역사를 가진 가톨릭의 몸속에 ‘소중한 체험’으로 박혀 있다. 그걸 통해 과학을 존중하는 눈이 열린 거다.
▶장 교수=상대적으로 개신교는 개교회 중심적이고, 덩치가 작다. 그러다 보니 그런 경험을 자신의 경험으로 받아들이진 못하더라. 가톨릭이 지동설을 받아들인 후에 어떤 변화가 있었나.
▶차 신부=지동설을 수용하면서 우리(가톨릭)의 우주는 더 넓어졌다. 하느님의 초월성을 설명하기도 더 쉬워졌다. 천동설을 고집할 때는 안 풀리고, 답답한 게 많았다.
▶장 교수=진화론에 대한 입장은 어떤가.
▶차 신부=지금 가진 생물학적•물리학적 데이터로는 진화론이 우세한 게 사실이다. 이걸 아니라고 하면 객관적인 접근법이 아니다. 진리를 향하는 태도가 아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진화론을 인정했다.
▶장 교수=생명 이해의 기본적인 틀은 진화론이다. 진화론을 외면하면 생명에 대한 이해를 차단하게 된다. 그건 매우 불행한 일이다. 생명을 잘못 알면 모든 게 틀어진다. 눈에 보이는 것만 ‘생명’이라고 생각하면 깊이 있는 생명 이해가 어려워진다. 시간적인 차원, 역사적인 차원의 생명 이해가 중요하다.
◆빅뱅과 천지창조-공존이 가능한가
- 성경에는 천지창조에 7일이 걸렸다고 기록돼 있다. 마지막 날은 하느님(하나님)도 일을 마치고 쉬셨다고 했다. 반면 과학자들은 빅뱅으로 인해 이 우주가 생겼다고 한다.
▶차 신부=빅뱅으로 인해 시간과 공간, 그리고 이 우주가 생겼다고 한다. 그래서 어떤 이는 신이 없다고 한다. 그게 아니다. 하느님은 빅뱅 이전부터 계신 분이다. 또 천지창조에 24시간씩, 실제 7일이 걸렸다고 믿는 기독교인도 있다. 성경 해석 방법이 미숙한 거다. 그건 은유적 표현이다. 창조론과 진화론은 대립하지 않는다. 우리는 진화론 속에도 창조의 손길이 있다고 본다.
▶장 교수=과학자들은 정말 이 우주에 엄청나고 놀라운 질서가 있음을 느낀다. 그건 알아나갈수록 더 높아지고, 더 심오해진다. 그래서 궁극적 결과에 대해 미리 단정짓지 않는다. 과학자들은 계속 찾아갈 뿐이다. 성경에 ‘내 형상을 함부로 만들지 말라’는 게 이 뜻이 아닌가 싶다. 우주는 계속 변화하고, 무언가를 향해 나가고 있다.
▶차 신부=굉장히 중요한 말씀이다. 그걸 철학적•신학적 용어로 ‘초월성’이라고 한다. 점점 더 새로운 것이 열린다는 거다. 그래서 과거의 것을 자기 스스로 파괴할 줄 알아야 한다.
◆하느님(하나님)의 형상-사람처럼 생겼나.
▶장 교수=많은 기독교인이 하느님은 사람처럼 생겼다고 본다. 창세기의 성경 구절 때문이다. 어찌 보나.
▶차 신부=성경에서 그 구절을 히브리어로 찾아본 적이 있다. ‘형상’이란 말의 히브리어 원어는 ‘셀렘(Selem, 영어로는 Image)’이다. ‘셀렘’은 ‘본질•속성’이 닮았을 때 사용된다. 반면 겉모양만 붕어빵처럼 똑같이 생긴 ‘형상’을 뜻하는 히브리어는 ‘데무트(Demut, 영어로는 likeness 또는 resemblance)’다. 결국 ‘하느님의 본질(속성)을 본 따 아담을 빚었다’는 뜻이다. 그러니 하느님을 의인화하고 인격화하며 ‘하느님은 이런 존재’라고 못 박는 건 곤란하다. 그건 초월적 존재인 하느님을 인간의 3차원적이고, 편협한 생각 속에 가두는 일이다.
◆신의 존재? - 성경인가, 자연인가
▶장 교수=초기 과학자들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성직자도 꽤 있었다.그 시대에는 하느님이 쓰신 두 권의 책이 있었다. 하나는 ‘성경(Book of Scripture)’이고 또 하나는 ‘자연의 책(Book of Nature)’이다. ‘스크립처’와 ‘네이처’ 서로 운율도 맞다. 성경과 자연, 그 속에서 과학자들은 하느님의 뜻을 찾으려 했다. 자연 속에 하느님이 새겨 놓은 말씀을 읽으려 했다.
▶차 신부=과학은 자연법, 종교는 영원법을 다룬다. 그런데 둘은 양자택일의 대상이 아니다. 우리(가톨릭)는 영원법 안에 자연법이 있다고 본다. 창조론 안에 진화론이 있다고 본다.
▶장 교수=다윈의 신앙이 구체적으로 어땠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과학자로서 느끼는 공감대가 있다. 다윈도 처음에는 생명이 그렇게 거대한 자연의 질서로 연결됐다는 걸 몰랐을 거다. 그걸 알았을 때 대단히 놀랐을 거다. 성경에 쓰인 문자대로의 신앙과는 다를 수도 있다. 다윈은 한 단계 더 깊이 들어간 내면적인 신앙을 가졌으리라 생각한다.
▶차 신부=1916년과 96년, 두 차례에 걸쳐 ‘과학자들의 신앙’을 조사한 자료가 있다. 결과가 흥미롭더라. 첫 조사에서 과학자의 40%가 유신론적 입장을 보였다. 그리고 80년의 세월이 흘렀다. 강산이 여덟 번 바뀌었다. 과학도 놀랄 만큼 발전했다. 과연 96년에 실시한 조사에선 과학자의 몇 %가 유신론적 입장을 보였을까. 답은 40%로 똑같다. 결국 궁극의 초월적 영역에 대한 선택은 주관적인 것이다.
▶장 교수=알베르트 아인슈타인(1879~1955)도 ‘신(神)’이란 단어를 많이 썼다. 많은 경우 이것은 자연의 질서를 말하는 은유적 표현이다. 그러면서 그는 한 걸음 더 나갔다. 그는 자연의 신비를 보라고 했다. 그걸 보면서 깊은 종교적 감흥을 느끼지 못하면 이상한 거라고 했다. 그건 특정 종교를 말한 것이 아니다. 본질적인 신앙적 체험을 이야기한 거다. 사람들은 흔히 기적이나 이적(異蹟)을 통해 신을 찾으려 한다. 아인슈타인은 달리 말했다. 자연의 질서를 함부로 벗어나는 게 신이 있다는 증거가 아니라고 했다. 오히려 자연의 오묘한 질서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신이 있다는 증거라고 했다.
◆생명과 신, 나와 우주의 관계
▶차 신부=이스라엘은 중동(中東)이다. 유럽이 아니라 아시아다. 그래서 성경은 동양적 사고에 더 가깝다. 그리스와 로마의 이분법적 사고가 아니라 동양 특유의 통합적 사고다. 그래서 종교도 ‘부분’과 ‘전체’를 함께 보는 시야가 필요하다.
▶장 교수=공감한다. 개인적으로 내겐 ‘생명이란 무엇인가’가 큰 숙제였고 화두였다. 우주는 끊임없이 변화한다. 모든 게 놀랍고 신비하다. 그 중에서도 ‘생명’이 특히 그렇다. 생명을 볼 때도 ‘부분’과 ‘전체’를 함께 봐야 한다. 생명은 낱낱으로 떨어져 존재하는 게 아니다. 내가 지금 혀를 움직여 말하고 있다. 무슨 에너지로 움직이나. 태양 에너지로 움직이는 거다. 이렇게 촘촘한 인과(因果)의 실타래로 엮인 것, 그게 생명이다.
▶차 신부=그건 물리학자로서 이해하는 생명의 내재적인 메커니즘이다. 좀 더 듣고 싶다.
▶장 교수=‘낱생명’인 내가 진정한 생명이 되기 위해서는 태양과 지구로 구성된 생명의 전체 틀, 곧 ‘온생명’ 안에서 그 한 부분으로 엮어져 있어야 한다. 마치 나뭇잎이 나무 전체를 떠나 나무 노릇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래서 ‘나’는 온생명이면서, 동시에 낱생명이라는 이중의 주체성을 갖고 있다.
◆인간과 자연 - 정복인가, 돌봄인가
▶장 교수=『종의 기원』이 나온 지 150년 지났지만 생명에 대한 이해는 훨씬 더 깊이 가야 한다. 진화론이 다소 협소하게 해석된 점이 있다. 적자생존까지는 좋은데 ‘약육강식이 자연의 질서’라는 식으로 나가기도 했다. 이는 아주 일면적인 해석이다. 진화의 밑바닥에는 경쟁과 지배가 아닌 거대한 협동의 체계가 있다. 생태계에선 수천 만의 생물 종들이 서로 협동하며 살아가고 있다.
▶차 신부=성경 창세기 1장28절에는 “온갖 생물을 다스려라”라는 구절이 있다. 그게 인간이 자연 위에 군림하라는 뜻일까. ‘다스리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를 찾아봤더니 ‘라다(radah)’였다. ‘라다’는 목동이 양을 돌볼 때 먹이고 다스리는 의미다. 그처럼 자연을 돌보라는 뜻이다.
◆진화와 창조, 그 궁극의 지향점
- 성경에는 ‘나는 알파요, 오메가다’란 구절이 있다. 알파는 시작, 오메가는 끝으로 풀이된다. 종교와 과학, 창조와 진화는 어떨까. 그 끝에 과연 궁극적인 종점이 있을까.
▶차 신부=일종의 메타포(은유)다. 이 현실계에서 이해하자면 ‘나는 창조자다, 나는 섭리자다’라는 말로 알아들을 수 있을 뿐이다. 물론 차원을 넘어선 세계에선 알파도, 오메가도 필요가 없을 거다.
▶장 교수=그 문제를 다룬 이가 고생물학자이자 가톨릭 사제인 테이야르 드 샤르뎅이다. 그는 과학을 바탕으로 신학의 그림을 그렸다. 물질의 단계, 생명의 단계, 인간의 단계를 거쳐 신의 궁극적 섭리에 이르는 ‘오메가 포인트’를 제시했다. 그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주는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 정지된 게 아니다. 생명이 처음 시작된 35억~40억 년 전에는 나를 구성하는 모든 분자가 지구상을 떠돌아다니는 먼지 덩어리에 불과했다. 지금은 어떤가. 그 먼지 덩어리가 변하고, 변해서 내가 됐다. 생각하고 말하고 있다. 내가 누구인지 묻는 존재, 우주에 대해 묻는 존재가 출현한 거다. 앞으로는 더 놀라운 일이 생길 거다. 과학자는 다만 여기에 대해 열려 있을 뿐이다.
▶차 신부=‘오메가 포인트’에 대해 철학자들은 진•선•미가 하나가 되는 곳이라고 말한다. 신앙적 측면에서 보면 요한묵시록 21장4절(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주실 것이다. 이제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이다)에 나오는 ‘눈물도 없으리라’는 세계를 지향하는 것이라고 본다.
▶장 교수=모든 것의 근원이고, 모든 걸 포괄하는 어떤 것. 과학은 그 최종 원리를 증명할 수는 없다. 최종 원리는 항상 가정으로 남는다. 우리는 과정 중에 있을 뿐이다. 그래서 ‘겸손함’과 ‘열려 있음’이 중요하다. 그래서 과학은 초월과 종교에 대해서도 문을 열어놓고 있다. 차 신부의 말대로 종교가 과학을 바라보며 문을 열어두고 있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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